두런두런..
‘사랑’이라는 말,
마리나1004
2009. 1. 30. 12:48
‘사랑’이라는 말, 우리는 참으로 쉽게 한다.
남녀 간에도 가족 간에도 또 교우 간에도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한다.
‘국민을 사랑한다’ ‘회사를 사랑한다’ ‘학교를 사랑한다’ 등으로 참으로 쉽게 사랑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말, 정말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말일까?
사랑을 검증할 수 있는 데는 세 가지 물음이 있다. 이 세 가지 물음을 통과한다면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첫째, 애살이 있느냐?
둘째, 언제나 잡스럽지 않은가?
셋째, 언제나 같은 거리에서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첫째, 애살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애살’이라는 말, 사전적으로는 욕심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랑을 검증할 수 있는 데는 세 가지 물음이 있다. 이 세 가지 물음을 통과한다면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첫째, 애살이 있느냐?
둘째, 언제나 잡스럽지 않은가?
셋째, 언제나 같은 거리에서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첫째, 애살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애살’이라는 말, 사전적으로는 욕심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애살과 애욕은 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애욕(愛慾)은 자신의 욕망의 연장선상에 상대를 올려놓는 것이다.
애욕(愛慾)은 자신의 욕망의 연장선상에 상대를 올려놓는 것이다.
통속적으로 말하면 ‘내 취향’을 쫓아가는 것인데 그것은 상대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 자신의 욕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소유욕에 충실한 것, 그것이 애욕이다.
애살이라는 것, 상대를 존중하고 아끼고 안타까워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애살이라는 것, 상대를 존중하고 아끼고 안타까워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애욕이란 것은 상대를 자신의 욕망 충족수단의 대상으로 보고 자신의 소유욕을 관철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그것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또 상대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애살이 없다면, 안타까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니
그래서 애살이 없다면, 안타까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니
사랑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둘째, 잡스럽지 않은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내 딴 눈을 팔고 딴 마음을 품는 것을 잡스럽다고 한다.
둘째, 잡스럽지 않은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내 딴 눈을 팔고 딴 마음을 품는 것을 잡스럽다고 한다.
사랑한다고 해 놓고 이내 다른 여자에게 눈길이 돌아간다면 이미 잡스러운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하나에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부자지간에도 그렇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자식도 공부가 시원치 않고
부자지간에도 그렇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자식도 공부가 시원치 않고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애물단지’처럼 취급된다. 사랑은 온데간데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색 퇴색한다면 그 또한 잡스러운 것이다.
일이나 공부도 그렇다.
한때는 의욕을 갖고 해 보다가 초심을 잃어버리면 잡스러운 것이다.
우리의 눈이 어두운 것은,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이 보이지 않고
우리의 눈이 어두운 것은,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이 보이지 않고
대상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다.
잡스럽기 때문에 눈이 어두운 것이다.
잡스럽다면 거기에는 순정(純情)이 없고 진정성이 없고 일관성이 없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여기에 변명의 여지는 없다.
셋째, 언제나 같은 거리에서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제 기분에 맞으면 좋고 제 기준에 맞으면 좋다.
셋째, 언제나 같은 거리에서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제 기분에 맞으면 좋고 제 기준에 맞으면 좋다.
그러나 제 기분에 맞지 않고 제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이내 토라지고 삐지고 거리가 벌어진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취향과 자신의 기준에 맞는 것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취향과 기준에 따라 장벽을 만들고 또 그것에 따라 거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변덕을 부리는 것이라면, 또 그런 식으로 좋아했다가 미워했다가
상대를 보는 입장이 왔다 갔다 한다면 사랑이 아니다.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자기 취향과 자기 기준을 사랑한 것일 뿐이다.
애욕은 자신의 편향성과 자기 기준에 맞는 것을 취하려는 것이고
애욕은 자신의 편향성과 자기 기준에 맞는 것을 취하려는 것이고
사랑은 취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야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자신도 있는 그대로를 내려놓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등거리를 말할 수 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하지 않는,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버리지 않을 때, 등거리를 말할 수 있다.
결국 사랑과 애욕의 결정적 차이는, 애욕은 상대를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고
결국 사랑과 애욕의 결정적 차이는, 애욕은 상대를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상대를 내 욕망 실현의 도구로 삼는 도구적 사랑일 뿐이지만
진짜 사랑은 도구적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가치를 보다 온전한 것으로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다.
즉 상대의 존재, 존재적 가치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랑(= 자비)를 단계적으로 보면,
첫째는, 집착이 되든 어떻든 애살이 있느냐?
그 다음에 잡스럽지 않느냐?
그 다음에 평등하냐? 등거리를 유지하고 있느냐?
이 세 가지를 물으면 거의 사랑은 검증이 된다고 보면 된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사랑을 실현하고자 일평생 위대한 봉사자의 길을 걸었던
사랑(= 자비)를 단계적으로 보면,
첫째는, 집착이 되든 어떻든 애살이 있느냐?
그 다음에 잡스럽지 않느냐?
그 다음에 평등하냐? 등거리를 유지하고 있느냐?
이 세 가지를 물으면 거의 사랑은 검증이 된다고 보면 된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사랑을 실현하고자 일평생 위대한 봉사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사랑이 부족함에 대해서 오열했고
애욕에 자신을 던졌던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배영순(영남대교수)